‘인생 작품’이라는 말은 어딘가 거창하게만 느껴진다. 지금부터 내가 뱉는 이 한마디로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일목에 설명될 것만 같은 조금은 억울한 느낌. 심지어는 허용되는 장르도 많아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게 많고 뚜렷해 장르마다 하나씩 이름을 댈 수 있는 탓이겠다. 돌고 돌아 ‘자기소개’라는 그 취지, 단순히 내가 작품을 통해 받은 어떤 감동을 넘어 그 속의 무언가에 나를 투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초점하며, 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시점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된 만큼 워낙 유명한 영화라 아마 어느 학창시절 와중이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몸도 머리도 지금보다 작았던 당시의 나에게 이 영화의 첫인상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꿈 같은 하룻밤 이야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잘 몰랐고 (여전히 모르지만) 이 두 주인공이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보다는 전체적인 서사의 흐름 그리고 그림에 더 주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며 조금은 더 독립적인 일상을 갖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 영화의 배경인 ‘여행’ 역시 내 일부가 되면서 나는 다시금 이 영화를 찾게 된 것이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우연히 서로의 옆자리에 앉은 두 남녀는 말을 트게 되며 식사를 함께한다. 비엔나에서 먼저 내린 남자는 아쉬운 마음에 다시 여자에게 돌아가 함께 내리자 제안했고 그때부터 둘의 시간제 여행이 시작된다. 남자의 이름은 제시, 여자는 셀린. 제시와 셀린은 밤이 되도록 비엔나 이곳 저곳을 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풀벌레 소리만이 유일한 밤의 공원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겨우 하루 뿐이지만 둘은 아낌없이 대화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하루 뿐이기에 그들은 다시 만날 날과 장소 그리고 시간만을 정해둔 채 헤어진다.
이 영화는 내가 성인이 되고 홀로 여행을 다니는 일이 잦아지면서부터 내게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우연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자꾸만 내 서사에 이 낭만적인 영화를 입히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위 이미지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친구와 통화하는 상황극을 연출하며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 셀린은 이때 이렇게 말한다.
- 기차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빈에서 같이 내려버렸어. 식당칸에 같이 있었는데 어릴 때 증조할머니 유령을 봤다고 얘기하더라고. 그때 반한 거 같아. 아름다운 망상을 가진 어린 소년 이야기였어.
사랑과 우연. 두 단어는 모두 어느 정도의 무모함을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뛰어들어야 할 것처럼. 나는 제시와 함께 그 무모한 비엔나의 밤을 결심한 셀린이 좋았다. 우연을 놓치지 않고 쥘 수만 있다면 끝까지 걸어가보는 편인 내 입장에서 그녀는 지극히 이상적이었다. 더구나 놀라울 정도로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가 내 것과 동일했는데, 다음 날 아침 분수대에 누운 셀린은 이렇게 말한다.
- 네가 아까 커플이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습관에 싫증을 느끼게 돼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고 했잖아. 난 정반대일 것 같아. 난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거든. 가르마를 어떻게 타는지.. 이런 날은 어떤 셔츠를 입는지.. 이런 상황에선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할지 알게 되면.. 난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내 사랑은 번번이 늦었다. 그러니까 실패한 내 사랑들은 전부 타이밍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는 겁이 많았고 그래서 시간이 필요했고 상대는 그 시간들을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기보다 알고 지내던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쉬웠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나의 첫사랑을 외로이 곱씹다 이 영화를 봤는데 그 장면에서 마침내 셀린이 내 어떤 응어리를 풀어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을 다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안다는 대목에서 말이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셀린의 대사들은 이따금씩 내게 어떤 경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 난 내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거에.. 남자에 인생을 걸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된다는 거에 의무감을 느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내겐 아주 큰 의미인데도 말야. 난 늘 그런 걸 비웃어 넘기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이 좀더 사랑받기 위한 거 아냐?
- 비엔나에 사는 부랑자들은 다양해서 맘에 들어. - 난 시가 인생을 흥미롭게 한다는 말이 맘에 들더라.
- 어떤 할아버지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 그분 말이... 자신은 평생 동안 일이나 출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살았대. 그런데 52세가 되고 보니 문득.. 자신은 아무것도 베풀지 않고 살았다는 게 느껴진 거야. 그분 인생에 타인을 위한 시간은 없었어. 울먹거리면서 그 얘길 하시더라...
-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란 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거야. 그 시도가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알게 뭐야, 안 그래? 대답은 그런 시도 안에 존재해.
내가 이 영화를 내 인생 작품으로 꼽는 것은 아마 셀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쫓기듯 살다가도 이 영화를 보고 셀린의 말들을 다시 주워 담다 보면 이내 0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 사랑과 이해, 꿈과 연민, 시와 모험. 이 같은 것들이 내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를, 그리고 그 동경을 영원히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말이다. 그러니까 셀린이 비엔나에서 잠깐 내려 그 사랑을 엿보았던 것처럼, 나는 이 영화로 잠시 내 일상에 갈피를 꽂는다.
내내 사랑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은 나의 지난 삼월의 얇은 레포트에서